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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의 맛/역사학의 맛

#1. 근대 학문으로서의 ‘역사’와 ‘역사학’

by 오정록 2025. 10. 13.

#1. 근대 학문으로서의 ‘역사’와 ‘역사학’

 

역사학이란 무엇인가. '역사학'을 알고자 한다면 '역사'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볼 때에는 '역사'라는 단어를 입에 올린 사람은 많아도, 그것이 무엇인지 대충이라도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손에 꼽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여러분이 만나는 사람들 전체의 3%도 안 될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은 역사를 왜 공부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역사는 흐름 중심으로 보는 것이지 암기가 아니다.."

"과거로부터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전적으로 맞다고 하기도 애매하죠.

어딘가 찝찝합니다.

 

그 까닭은 이런 문장들이 역사의 의미나 가치를 두루뭉술하게 표현하는데 있습니다. 사실, 저 답변은 굳이 역사가 아니고 다른 인문학 분야 어딘가의 쓸모에 대한 대답이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습니다.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무언가의 쓸모를 이야기하려면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 그 개념을 정확히 알아야 하고, 그 개념을 정확히 알면 쓸모에 대한 답은 자연스럽게 찾을 수 있습니다. 물론 독자 여러분 한 명 한 명의 답은 분명 다를 것입니다. 하지만 애초에 인문학의 묘미는 명확한 답이 없는 것을 여러 개념을 통해 차근차근 설명하고, 그 설명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는데 있기에, 답이 안 나온다는 것은 전혀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의 글은 역사란 무엇인지, 그리고 역사학이란 무엇인지 알 수 있도록 간략히 소개한 글입니다.

이 글을 읽고 나면, "독자 여러분은 역사를 왜 공부한다고 느끼는가?"와 같은 물음에 그저 두루뭉술한 답만 내놓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 번에 전부 다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절반, 아니 삼분의 일이라도 좋습니다. 어차피 첫 술에 배부를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원래 인문학이든 자연과학이든, 누구나 처음에는 지식이라는 것 자체를 부분적으로만 쌓을 수 있다고 인정합시다. 초보자 단계에서 가장 즐거운 순간은 누군가와 이야기할 때 써먹을 때이니, 오늘의 글을 잘 읽고, 누군가와 우연히 역사에 관해 이야기한다면 기억나는 일부분이라도 떠올려보세요. 아주 뿌듯할겁니다.

 

이 작은 블로그의 첫 글을 읽은 독자 여러분이 얼마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 글을 접한 몇 안 되는 독자들께서 그 흥미를 아주 조금이라도 느낀다면 나는 매우 만족할 것 같습니다.

 

나침반, 지도, 잉크로 쓴 연대기, 손때 묻은 지도가 그려진 사진.
사료와 기록의 세계를 보여주는 이미지. (출처: Freepik)

 


Ⅰ. ‘역사(史)’와 ‘역사학(史學)’

 

우리가 흔히 “역사”라고 부를 때 두 가지가 겹쳐 있습니다. 하나는 과거에 실제로 일어난 일과 그 흔적들, 다른 하나는 그 흔적을 연구해 설명하려는 지식 활동입니다. 앞의 것을 편의상 역사(History, 史), 뒤의 것을 역사학(Historiography, 史學)이라 부르겠습니다.

 

역사는 문자 기록, 법령, 편지, 비문, 신문 기사, 사진, 구술, 유물과 유적 등 무수한 흔적(사료)의 집합입니다. 이 사료들은 사실의 단편을 담고 있지만, 문맥과 관점, 기록자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어 그대로 “진실”을 말해 주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근대에 이르러 역사학은 이런 사료를 체계적으로 비판(사료비판)하고, 서로 교차 대조하며, 그 사이에서 패턴과 인과관계를 찾아 설명 가능한 이야기로 엮어 내는 방법을 발전시켰습니다.

 

근대 역사학을 대표하는 이름으로 흔히 레오폴트 폰 랑케가 거론됩니다. 요지는 “사료를 스스로 말하게 하라”는 태도, 그리고 “과거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는” 지향입니다. 이런 표어가 말해 주듯, 근대 역사학은 자연과학처럼 객관성 법칙성을 추구하려 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외적·내적 비판을 통해 사료의 진위를 가리고, 원인과 결과를 가능한 한 분명히 밝히려 했지요.

 

다만 인간 사회를 다루는 학문에서 단선적(일방향적)인 인과 보편 법칙을 깔끔하게 제시하기는 어렵습니다. 원인은 대개 다층적이고, 상호작용하며, 우연한 요소도 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인과를 지나치게 단순화하면 도식화의 위험이 생깁니다. 세상에 인간의 일을 어떻게 도식으로 만들어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도식화된 틀은 어느 정도 설명력을 주지만, 사회 변동을 한 줄의 서사로 꿰맞추면 지역, 계층, 그리고 시대의 차이를 지워 버릴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근대 역사학의 공은 사실과 근거 중심의 설명을 정착시킨 데 있지만, 그 강점이 곧 약점이 되지 않게 늘 경계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겠죠.

 

이 지점에서 중세의 서술과 비교하면 차이가 선명해집니다. 중세 연대기는 사건을 신학적 틀 속에서 이해하려는 경향이 강했고, 최종적 권위를 신적 질서에서 찾곤 했습니다. 근대 역사학은 그와 달리 “무엇이 왜 그렇게 되었는가”를 검증 가능한 근거로 설명하려 했고, 그 노력의 연장선에서 오늘의 연구·교육 관행이 자리 잡았습니다.

 

 

Ⅱ. 포스트모던 역사학: 해체 이후 무엇을 보게 되었나

 

20세기 후반부터는 근대 역사학의 자신감을 상대화하는 흐름, 소위 포스트모던 역사학이 힘을 얻습니다. 출발점은 솔직합니다. 복잡한 사회현상을 완벽한 원인-결과 사슬로 환원하는 일은 불가능하며, 역사에는 우발성이 크게 작용한다는 인식입니다. 전쟁의 발발처럼 거시적 사건도 외교문서와 경제지표만으로 설명되지 않고, 개인의 판단 착오나 돌발적 사건, 자연환경 같은 요소가 결과를 바꾸기도 합니다.

 

이 인식은 역사학이 과학(science)인지 문학(literature)인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졌습니다. 역사 서술은 언어로 쓰이며, 언어는 선택과 생략, 비유와 구성의 산물입니다. 그래서 포스트모던의 시각은 “사실”을 부정하기보다, 사실의 서술 방식 권력 관계, 그리고 시선의 위치를 문제 삼습니다. 그 과정에서 기존의 거대 서사에서 밀려난 주변부(periphery), 소수자(minorities)에 대한 관심이 크게 확장되었습니다. 식민지 경험, 이주와 디아스포라, 작은 지역의 역사 등이 본격화된 것도 이런 흐름과 맞닿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근대 역사학을 ‘무작정 해체’하는 것이 목표는 아닙니다. 포스트모던의 성과는, 역사 서술이 가진 한계를 자각시켜 겸손한 설명을 가능하게 했다는 데 있습니다. 반대로 한계를 꼽자면, 모든 설명을 상대화하기만 하면 판단 불능에 빠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역사가는 사실 검증과 인과 분석(근대의 유산) 위에 시선의 다원성, 언어의 층위, 권력의 비대칭(포스트모던의 통찰)을 겹쳐 읽는 혼합적 실천을 시도합니다.

 

 

Ⅲ. 두 관점의 생산적 결합: 독자를 위한 실천적 가이드

 

입문 단계에서 기억해 둘 만한 요령을 서술형으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우선, 한 편의 역사 글을 읽을 때 “무엇이 사실로 제시되는가”와 “그 사실들이 어떻게 연결되는가”를 분리해서 봅니다. 앞의 것은 사료 인용과 통계, 날짜·지명·인명 같은 기초 정보의 문제이고, 뒤의 것은 해석의 문제입니다. 다음으로 “다른 설명이 가능했을까”를 떠올려 봅니다. 구조(경제·제도), 행위자(지도자·집단), 우연(돌발 상황) 중 무엇이 과도하게 강조되는지 점검하면 글의 균형을 가늠하기 좋습니다. 마지막으로 “누구의 시선이 배제되었는가”를 찾아봅니다. 주변부와 소수자의 관점을 덧대면 같은 사건도 전혀 다른 의미를 드러낼 때가 많습니다.

 

연구나 글쓰기에서도 절차는 비슷합니다. 먼저 사실 확인을 견고히 하고(사료의 출처·맥락·신뢰도), 이어 맥락화를 통해 시·공간적 배경을 분명히 합니다. 그다음 설명 가설을 세우되, 반례를 의식적으로 찾아 검증합니다. 마지막으로 서술 단계에서 문장의 단정성을 조절합니다. “~ 때문이다”라고 말할 근거가 충분한지, 아니면 “~에 크게 기여했다”, “~와 맞물려”처럼 강도의 표현을 조정해야 하는지 스스로 물으면, 지나친 일반화를 피할 수 있습니다.

 

 

Ⅳ. 맺음말: ‘사실에 강하고, 시선에 민감한’ 역사

 

근대 역사학은 사실과 인과에 기초한 설명의 기술을 정교화했습니다. 포스트모던 역사학은 설명이 이루어지는 언어와 시선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게 했습니다. 초심자에게 가장 유익한 태도는 둘을 대립시키기보다, 사실에 강하고 시선에 민감한 읽기와 쓰기를 동시에 연습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도식화의 유혹을 경계하면서도, 주변부와 경계가 비추는 새로운 풍경을 설명 가능한 언어로 포착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