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부르는 대로 달라지는 역사 — 명칭과 기억의 힘

I. '이름 붙이기'는 엄청난 권력입니다
우리가 사건과 사람에게 붙이는 이름은 과거의 사실을 그대로 옮긴 표지가 아니라, 현재의 우리가 덧붙인 의미입니다. 그래서 이름 붙이기(호명)는 단순한 설명이 아니라 힘의 행사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중종반정”이라는 말은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았다는 뉘앙스를 미리 깔아 새 권력에 정당성을 줍니다. “5·16혁명”이라 부르던 일을 오늘날 “군사반란”이라 부르는 것도 같은 사건을 전혀 다른 틀로 읽겠다는 선언입니다. “광주사태→항쟁→민주화운동”으로 바뀐 흐름은, 이름이 바뀌면서 사회가 그 사건을 다른 가치로 다시 이해하게 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국가 간·집단 간의 관계에서도 이름의 힘은 큽니다. 한때 교과서와 박물관이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을 강조했다면, 오늘은 같은 일을 “유럽인의 도착·정복”으로 쓰기도 합니다. “동학농민운동”을 “동학농민혁명”으로 격상해 부르는 결정, “제주 4·3사건”을 줄여 “제주 4·3”이라 부르며 국가 폭력과 희생의 의미를 분명히 하는 일도 그 연장선입니다. 또한 2003년의 전쟁을 두고 어떤 이는 “이라크 전쟁”이라 부르고, 어떤 이는 “이라크 침공”이라 부릅니다. 어떤 단어를 택하느냐가 곧 사건의 성격을 규정합니다. 이름 짓기와 이름 부르기 자체가 역사 연구의 한복판에 있으면서도 사회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II. 역사학에서의 '기억': 무엇을 지우고 무엇을 드러내는가
이름은 기억을 설계합니다. 국가는 그 기억을 통해 정체성을 만들고, 정책을 정당화합니다. 미국의 사례를 보시면, 한때 이민자들을 “old/new immigrants(오래된/새로운 이주자)”로 갈라 부르고, 법으로 입국을 제한했습니다. 오래된 이주자는 서•북유럽 선진국 출신 이주자였고, 새로운 이주자들은 동유럽 출신을 말합니다. 학계에서는 시간이 지나면 모두가 하나의 동일한 정체성으로 자연스레 수렴한다는 모델을 퍼뜨리기도 했습니다. 소위 '열등한 이주자'들이 결국 우월한 정체성으로 수렴해 간다는 것이지요. 겉으로는 중립적 설명처럼 보여도, “어떤 모습이 표준인지”를 은근히 정해 놓은 셈입니다. 프랑스에서는 이주사를 전시하는 박물관이 국가 서사 만들기에 쓰였습니다. 이때 프랑스가 행한 식민 지배의 폭력과 약탈은 흐릿해지고, “이주”라는 말 아래 부드러운 연속성만 남았다는 비판이 뒤따랐습니다.
이런 사례가 우리에게 던지는 물음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그 이름과 전시가 무엇을 지우고 무엇을 부각하는가. 소수자·피지배자의 경험, 강제와 폭력이 말 바꾸기 속에서 지워지지는 않는가. 둘째, 기억과 호명은 어디까지 정당한 정치적 실천인가. 국가는 공적 기억을 관리할 의무가 있지만, 그 과정에서 다양한 목소리를 눌러 버리는 순간 기억은 편향의 도구가 됩니다. 결국 기억의 정치는 피할 수 없지만, 그 정치가 누구에게 어떤 결과를 낳는지 끊임없이 점검되어야 합니다.
맺음말을 대신하여: 어디까지 정당한가 - 책임 있는 이름 붙이기
호명과 기억은 중립이 되기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호명과 기억을 활용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죠. 이름을 부르고 남기는 일은 역사 연구의 핵심이자, 사회가 과거를 정리하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단순합니다. 이름을 피할 수 없다면, 어떤 기준으로 더 나은 이름을 선택할 것인가입니다.
무엇보다 근거가 필요합니다. 이름에는 언제나 이유가 있어야 하며, 그 이유는 당대의 문서와 증언, 통계처럼 검증 가능한 자료로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감정이나 정치적 입장에 앞서, 이름이 가리키는 사실이 무엇인지부터 분명해야 합니다.
또한 관점을 밝히는 일도 중요합니다. 연구자나 필자가 어떤 시각에서, 어떤 범위를 전제로 이름을 사용하는지 명시하면 불필요한 논쟁을 줄일 수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정치 제도의 변화를 중심으로 ~을 이렇게 부르겠다”는 한 문장만으로도 기준은 명확해집니다.
이름의 변화는 단순한 단어 선택이 아니라 세계를 보는 방식의 이동이기도 합니다. “콜럼버스의 발견”이라는 표현을 “유럽인의 도착”으로 바꾸는 일은, 같은 사건을 전혀 다른 가치의 틀 안에서 다시 바라보겠다는 선언입니다. 과거의 명칭과 오늘의 권고 표현을 함께 제시하면, 이름이 바뀌는 과정 자체가 학습의 계기가 됩니다.
한마디로 간단히 말하면, 이름 붙이기는 과거에 대한 현재의 책임입니다. 좋은 이름은 사실 위에서 출발해, 기준을 공개하고, 약한 목소리를 더하며, 사회적 파장을 함께 살핍니다. 그렇게 할 때 명칭의 변화는 단순한 말 바꾸기가 아니라, 공동체가 스스로를 이해하는 방식을 한 단계 더 성숙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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